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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Big To Innovate : 대감집 체험기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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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Big To Innovate : 대감집 체험기 (3)

heave_17 2021. 9. 1. 00:12

3.1. 혁신이라는 단어의 모호함

새롭게 합류한 부서는 확실히 일반적인 부서들과는 달랐다. 회사도 사양산업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자, 팀원들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와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끔 허락해주고자 했고, (초반에는) 성과 압박같은 것도 주지 않았다. 대감집에서 이런 부서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행운으로 느껴졌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전까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문제를 만나게 되었다. 혁신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서로 원하는 혁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다. 다양한 형태의 혁신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누구나 그렇다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혁신이라는 것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정의했을 때, 혁신을 시도하고자 할때 이 다형성은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갖는다. 기존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팀원들이 모두 그 혁신을 원하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비전에 동의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의 사기와 능률은 굉장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내 경우는 워낙 스타트업 쪽에서 다양한 혁신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이 많이 생겼고 엔지니어 베이스이기에, 그 전까지는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지 않는 혁신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유명한 혁신을 선도하는 스타트업들도 결국에는 새로운 IT, AI 기술들을 적용하기에 그렇게 새로운 시장을 선도하며 몸집을 불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대감집의 혁신이라 함은 새로운 시장을 선도해야 하며, 그렇다면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영역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즉, 내가 생각했던 혁신의 형태는 신기술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팀원들 대다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넘을 수 없는 선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보다는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지만, 현재와 앞으로 트렌드가 될 시장에 진입하거나 디자인적인 변화를 통한 혁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절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서로 다른 혁신을 추구했을 뿐이다.

심지어 윗선에서 바라는 혁신은 또 다른 형태였다. 기술이니, 디자인이니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윗선에서 원했던 것을 내 언어로 정리하자면 "누가 들어도 그럴듯하지만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심플한 변화"라고 느껴졌다. 딱 들었을 때 "왜 그런 생각을 못했었지?" 이런 반응이 나올만한 아이디어를 찾았다. 그럼 그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도출할 수 있을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며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길 기도하며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일까?

3.2. 밀실에서 누리는 자유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심플한 변화"를 찾고자 하는 윗선에서는 확실히 자유로운 업무 환경을 보장해주었다. 영감을 얻을 수 있게 다양한 제품을 사용해볼 수 있었고, 여러 장소를 다니며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Ideation에 도움이 되는 활동이라면 뭐든지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보안이라는 벽이 존재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거나 외부에서 테스트해볼 수 있는 기회들은 오히려 제한됐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느껴졌다. 현재 혁신을 선도하는 스타트업들의 얘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들 trial and error를 통해 성과를 창출해나가고 있다. 일단 시도해보라는 린스타트업 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스타트업들의 바이블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자유롭게 근무하며 부서 안에서만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팀원들끼리만 토의하는 것이었다. 마치 밀실에 가둬놓고 "너는 자유야. 이 방 안에서는 뭐든 지원해줄테니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해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 있는 슈퍼맨이라면 밀실조차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가진 것에 비해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고, 하고 싶은걸 해보기 위해서는 나한테, 우리 팀에게 없는 능력들을 외부에서 찾고 시도해보는 과정들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보안이라는 문은 쉽게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밀실에서도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혁신은 밀실에서는 불가능했다.

이전에 관객과 배우들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연극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극에서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방 안에 갇혀 있는 A가 스스로 갇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사람은 자유로운가?" 다행히 나는 A는 아니었다. 방 안에 갇혀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갇혀있던 방 안에 내가 원했던 혁신은 없었고, 그렇게 나는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